남녘 여행7 - 부산의 추억

내가 부산을 처음 본 것은 까마득한 옛날 일제 강점기시대인1944년 초여름 같다.


일본 오사카에 태어나 자라고 국민학교에 들어 갈 지음 태평양 전쟁이 났고 일본의 전세가 불리해지고 일본 본토에 미군 공습이 임박해 지자 도시의 어린이들을 <소까이> (시골에 분산 피난시키는 조치)시키게 되었다.

조선 사람인 나를 일본 시골에 피난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 부친은 출가해서 의정부에 살고 있는 큰 누님댁으로 보낼 생각을 하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를 따라 오사카에서 시모노세끼(下関)까지 기차를 타고 와서 관부(關釜)연락선(<시모노세끼(關>와부(釜)산을 있는 연락선)을 타고 조국땅부산을 처음 보게 된 것이다.

아직도 남아 있는 기억은 밤 늦게 시모노세끼에서 연락선을 탔고 선저에 있는 3등선실인 여러 사람이 같이 쓰는 다다미방에서 잠을 잔 것 같다. 고동소리가 나는 아침에깨어 갑판에 올라와 보니 절벽같은 산이 보이는 부산을본 것이다. 내 선조가 살던 조국의땅으로 처음 본 곳이 부산이다. 그러니까 그런 인연으로 따지면부산은 내가 조선사람으로 다시 난 곳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경부선 완행열차를 타고 <게이죠(경성 - 서울)>에 갔다.

이후 나는 의정부, 대전, 서울등을 옮겨 다니며 살았고 625전쟁이 날 때 까지 부산에 다시 갈 기회는 없었다.

625전쟁이나자 우리집안 와해되다싶이 되었고 대학에 갈 형편이 안된다고 생각한 나는 해군사관학교(해사)에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휴전이 되던해 해사에응시하여 수석으로 합격했다. 그 때문에 난 해사를 퇴교하기 위해 엄청난 곤욕을 치뤄야 했다. 해사 입교식은 1954년 3월었지만 두달전 1월에 해사로 합격자들을 소집했다.


입교식 이전에 소위 지옥의 훈련이란 특별훈련을 시켜 제대로 된 군인을 만든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신체검사를 하는 등 2차 최종 선발을 하게 되어 있었다.


이 합격자 소집에 응하기 위해 서울에서 진해에 가야 하는데 직행하는 기차편은 없었고 부산에 가서 일박하고 다음날 아침에 진해행 열차를 타야 했다.

밤 늦게 부산에 닿았다. 부산을 처음 본 이후 10년만이다. 부산역 근방에 있는 허름한 여관을 찾아 들어 갔다. 여관 방은 이부자리를 깔면 아무 공간도 남지 않은 아주 좁은 방이었다.


저녁은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에 없지만 이부자리를 펴고 자려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아가씨 하나가 불쑥 들어 온다. 기절 초풍할 노릇이다. 옷을 벗고 내 이부자리에 들어 올 기색이다. 너무 너무 놀란 나머지 소리 쳐 쫓아 냈지만 억울하다는 눈치였다. 1954년 부산역전 근방은 창녀촌이었던 같다. 방의 생김생김이나 아가씨가 그냥 들어 오는 것으로 보나 내가 잘못 들어 간 것이다.


어떻든 잠을 자는둥 마는둥하고 일찍 나와 파출소를 찾아 가서 항의를 했던 생각이 난다. 경찰관은 싱글벙글 웃을 뿐 별 말이 없다. 여관이라고 간판을 걸어 놓고 성매매를 하는 것을 단속하지 않느냐는 항의였던 것 같은데 까까머리 순진떼기 고딩이 우숩게 보였던 같다.


해사에 들어와 동기들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해사에 들어 올 땐 일부러라도 창녀촌에 가서 <총각딱지>를 떼고 오는데 "순진하기"는 하는 눈치였다.


"서울가는 십이열차에 기대 앉은 젊은 나그네 ...." 하는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 정거장" 이 바로 1954년 대 유행을 했던 노래인데 그 때 이 부산 정거장에 서린 내 추억은 아직도 아련하다(?)


아아 그리운 옛날이여!




Posted by 샛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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